소 식
[변호사칼럼] 선택적 친절은 친절이 아니다

배철욱 법무법인 대세 대표변호사
[금강일보] 미국의 사상가이자 소설가 헨리 제임스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친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친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역시 친절해야 한다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법정스님도 그의 마지막 책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친절이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다. 사람끼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보다 따뜻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친절은 자비의 구체적인 모습이다.”고 하였습니다.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 역시 자신의 딸들에게, ‘친절한 사람이 될 것’, ‘쓸모 있는 사람이 될 것’ 두 가지를 강조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친절의 중요성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또 사실 모두가 알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매 순간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저도 직업의 특성상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친절하게 대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봤습니다. 왜 누군가에게는 친절하게 대하고 누군가에게는 친절하게 대하지 못하는지. 세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친절하게 대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족, 직장동료,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입니다. 솔직히, 제게 이득을 주는 사람도 이 부류에 속합니다. 사실 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제가 그러고 싶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에게도 순간적으로 불친절할 때가 있지만, 금방 친절한 태도를 회복합니다.
다음으로, 친절하게 대해도 되고 그렇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친분관계도 없고 이해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하는데, 어찌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친절하게 대해야 하는 심리적, 경제적 동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 이유로 이들에게도 친절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편입니다. 일단 이들에게 친절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고, 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썩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자영업자인 제게는 이들이 잠재고객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대체적으로 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문제가 되는 마지막 부류가 있습니다.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친절하게 대하기 어렵습니다. 친절은 고사하고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대화가 곱게 끝나기도 어렵습니다. 친절하자고 여러 번 되뇌어도 어느 순간 치솟는 분노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왜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친절하기 어려운지, 무엇이 나를 그들에게 불친절하게 만드는 것인지를.
되돌아 생각해보니, 저는 제게 무례하거나 불친절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불친절하게 대했던 것 같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식으로, 저를 대하는 말투, 표정, 행동이 무례하거나 불친절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저 역시 불친절로 일관해 왔고 또 그러한 불친절을 합리화해왔습니다. 요컨대 저는 일단 제가 친절하게 대할 사람과 불친절하게 대할 사람을 제 기준에서 판단하여 그에 따라 선택적으로 친절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사람들에 대한 저의 판단과 선택적 친절은 합당한 것인가 자문해봅니다. 어떤 사람의 특정한 말과 행동이 곧 그 사람이 나를 대하는 진심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지. 난감한 상황에 처한 어떤 사람이 너무도 황망한 나머지 듣는 이를 충분히 배려하지 못하고 또 세련되지 못한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억울함만을 호소할 때, 그의 태도를 무례하거나 불친절한 것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지. 그를 무례하다거나 불친절하다고 판단한 것은 철저히 개인적 기준에 따른 것은 아닌지. 나의 주관적 판단에 논리적이거나 합당한 근거는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지.
결국, 지금껏 제가 유지해온 선택적 친절은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왜냐하면 이미 선택의 과정 자체에 상당한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선택적 친절은 이미 친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람은 물론 모든 존재에 대해 친절해야 한다는 법정스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곱씹어 봅니다. 배철욱 법무법인 대세 대표변호사
이처럼 친절의 중요성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또 사실 모두가 알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매 순간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저도 직업의 특성상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친절하게 대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봤습니다. 왜 누군가에게는 친절하게 대하고 누군가에게는 친절하게 대하지 못하는지. 세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친절하게 대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족, 직장동료,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입니다. 솔직히, 제게 이득을 주는 사람도 이 부류에 속합니다. 사실 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제가 그러고 싶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에게도 순간적으로 불친절할 때가 있지만, 금방 친절한 태도를 회복합니다.
다음으로, 친절하게 대해도 되고 그렇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친분관계도 없고 이해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하는데, 어찌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친절하게 대해야 하는 심리적, 경제적 동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 이유로 이들에게도 친절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편입니다. 일단 이들에게 친절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고, 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썩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자영업자인 제게는 이들이 잠재고객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대체적으로 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문제가 되는 마지막 부류가 있습니다.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친절하게 대하기 어렵습니다. 친절은 고사하고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대화가 곱게 끝나기도 어렵습니다. 친절하자고 여러 번 되뇌어도 어느 순간 치솟는 분노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왜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친절하기 어려운지, 무엇이 나를 그들에게 불친절하게 만드는 것인지를.
되돌아 생각해보니, 저는 제게 무례하거나 불친절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불친절하게 대했던 것 같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식으로, 저를 대하는 말투, 표정, 행동이 무례하거나 불친절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저 역시 불친절로 일관해 왔고 또 그러한 불친절을 합리화해왔습니다. 요컨대 저는 일단 제가 친절하게 대할 사람과 불친절하게 대할 사람을 제 기준에서 판단하여 그에 따라 선택적으로 친절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사람들에 대한 저의 판단과 선택적 친절은 합당한 것인가 자문해봅니다. 어떤 사람의 특정한 말과 행동이 곧 그 사람이 나를 대하는 진심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지. 난감한 상황에 처한 어떤 사람이 너무도 황망한 나머지 듣는 이를 충분히 배려하지 못하고 또 세련되지 못한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억울함만을 호소할 때, 그의 태도를 무례하거나 불친절한 것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지. 그를 무례하다거나 불친절하다고 판단한 것은 철저히 개인적 기준에 따른 것은 아닌지. 나의 주관적 판단에 논리적이거나 합당한 근거는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지.
결국, 지금껏 제가 유지해온 선택적 친절은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왜냐하면 이미 선택의 과정 자체에 상당한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선택적 친절은 이미 친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람은 물론 모든 존재에 대해 친절해야 한다는 법정스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곱씹어 봅니다. 배철욱 법무법인 대세 대표변호사